▲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

[코리아데일리 이상규 기자]

정치권에서 의리의 사나이로 통하는 서청원(徐淸源) 새누리당 의원은 기자를 하다가,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였다.

제11, 13, 14, 15, 16, 18, 1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통일민주당 대변인, 신한국당 원내총무, 정무장관 및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미래희망연대 대표를 역임하였다.

1943년 4월3일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세골에서 태어난 그는 중앙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 국회의원회관에서 고민에 빠진 서청원 의원
1981년 11대 총선에서 서울 동작에서 민한당 소속으로 첫 당선됐으나, 12대 총선에서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2대 총선에서 야권 정치인 중심으로 창당된 ‘신민당 돌풍’을 목격한 서 전 대표는 1985년 ‘김영삼계’와 ‘김대중계’의 야당 인사들이 연합해 구성한 재야정치단체인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 들어갔다. 1989년에는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다.

상도동계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후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선봉에 섰고, 과거 김영삼 정부에서 정무 제1장관과 신한국당 원내총무를 맡으며 정계의 거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 기자에 둘러 싸여 기자회견중인 서청원 의원
당시 원내대표에 해당하는 원내총무 시절 그는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을 끌어내는 협상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었던 서 의원이 박 대통령의 대구 달성 재보선 공천에 직접 관여하면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에는 ‘박근혜 캠프’에 전격 합류하면서 측근 중의 측근으로 떠올랐다.

2008년에는 18대 총선 공천에서 친이(친이명박)계에 밀려 자신을 포함한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낙천되기도 했다.

▲ 당대표 출마 후 지지자들과 함께한 서청원 의원
이에 서 전 대표는 공천 결과에 불복하고 ‘친박연대’를 결성, 대표직을 수행했다. 그 결과 의석수 14석을 확보, 이른바 ‘친박 돌풍’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창당하는 과정에서의 관행이 발목을 잡아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옥고를 치르게 된다. 서 전 대표는 지난해 1월 사면·복권됐으며, 새누리당은 그 해 4월 서 전 대표의 복당을 승인, 상임고문에 위촉했다.

▲ 결혼식 사진
서 전 대표는 앞서 기자회견에서 공천 헌금 비리 사건과 관련, “내가 돈을 받은 게 아니다. 당에 들어간 돈에 대한 당 대표 책임을 물은 것”이라며 억울함을 거듭 호소한 바 있다.

정계의 한 전문가는 “서청원 의원은 지난 1981년 국회의원 금배지를 처음으로 단 이후 30여년 정치사를 목도한 노정객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롤러코스터를 탄 듯 정치적 부침을 겪어 ‘풍운아’라는 별칭도 붙어 있는 한국 정치사으 가장 큰 거목이다”고 그를 평가하고 있다.

▲ 정계의 풍운아 의리의 사나이 서청원 의원
서 의원을 아는 원내외 인사들은 그를 인간 냄새가 풍기는 정치인이라고 입을 모으기도 한다.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고 있다.

한편 ‘서청원이 나서는 선거는 무조건 이긴다’는 말도 있다.

서 의원은 부인 이선화(69)씨와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프로필은 1943년(70세) 충남 천안 ▲중대부고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중앙대 총학생회장 ▲조선일보 기자 ▲국회의원(11·13~16·18대) ▲통일민주당 대변인 ▲정무장관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신한국당 원내총무 ▲한나라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대표 ▲친박연대 대표 ▲새누리당 상임고문을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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