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장군(좌측)

[코리아데일리 이규희 기자]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 청문회에서는 과거 '한나라당 불법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이 도마에 오른 가운데 5.16에 대한 입장에 대해 쿠데타로 생각한다는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새정치연의 김광진 의원의 질문에 "5·16은 학술적으로나 뭐로나 쿠데타라는 건 분명하다“면서 ”그러나 당시 상황이 대단히 심각했던 건 사실이며 학생들이 판문점으로, '가자, 북으로' 할 땐데… 5·16으로 인해서 정치발전이 조금 늦어진 건 사실이다“고 답변한 것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5,16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5·16군사정변은 박정희 장군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당시의 민족적인 내용에 의해 일으킨 군사혁명 사건을 말한다.

5·16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 ·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 혁명을 축하하는 시민들
그 6개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을 했다.

군정기간 중 군사혁명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시행하였다. 1963년 말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제3공화국은 정식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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