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란 장군의 초상화

[코리아데일리 지수진 기자]

이지란 장군은 고려말 조선초의 장군·공신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청해(青海). 초성은 퉁(佟),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 자는 식형(式馨). 남송 악비(岳飛)의 6대손으로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화(阿羅不花)의 아들이며, 화영(和英)의 아버지이다.

이성계와는 결의형제를 맺었고, 출신지는 북청(北青 ; 青海)이다. 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조카딸인 혜안택주 윤씨(惠安宅主尹氏)이다.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가 되었으며, 1371년(공민왕 20)에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여 북청에서 거주하며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1380년(우왕 6) 이성계의 편장으로서 황산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무찔렀으며(황산대첩), 1385년 이성계의 휘하로 왜구를 함주에서 격파하여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에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1388년 위화도(威化島)의 회군에 참가하여 1390년(공양왕 2) 밀직사가 되었다. 같은 해 서해도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司事) · 지문하부사(知門下府車)에 임명되었다.

▲ (방송 캡쳐)
1392년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 여진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의 반란을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 의하여 청해백(青海伯)에 봉해졌다. 조선에 와서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공훈으로 1392년(태조 1)에는 참찬문하부사(參賛門下府事)에 오르고 보조좌명개국일등공신(補祚左命開國一等功臣) 청해군(青海君)에 봉해졌다. 1393년 경상도절제사로 왜구방어를 담당하었고 이어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갑주 · 공주(孔州)의 성을 축조하였다.

또 위화도의 회군에 참가한 공훈으로 회군일등공신(回軍一等功臣)에 봉해졌다. 1393년 동북면도안무사, 1397년 등북면도병마사,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賛成事) · 판형조사의흥삼군부사중군절제사(判刑曺事義興三軍府事中軍節制使)가 되었다.

같은 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정사공신(政社功臣) 2등에 봉해지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봉해졌다. 태조가 영흥으로 은퇴하자 그도 풍양(豊壤)에 은거하면서 남정 · 북벌에서 많은 살상한 것을 크게 뉘우쳐 불교에 귀의하였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읍 안곡리에 있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화원악보(花源樂譜)》에 그의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초산(楚山)에 우 범과 패택(沛澤)에 긴 용(龍)이, 토운 생풍(吐雲生風)여 기세(氣勢)도 장(壯)헐시고, 진(秦)나라 외로운 슴은 갈 ㄱ곳 몰라 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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